제 2일: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 공동체를 세우는 삶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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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체를 세우는 삶 II

 

제 2일: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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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천민
댓글 6건 조회 612회 작성일 14-07-01 22:45

본문

day2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사랑은 의지적인 행동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기로 결단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다른 지체들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든, 그들이 전혀 사랑스럽지 않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 사랑하는 것이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과 교회, 그리고 소그룹에 보내 주신 다른 지체들을 적극적으로, 계속적으로, 그리고 깊이 사랑해야만 한다.
사랑은 명령이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사랑하기로 결단해야만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너무나도 중요하게 생각하시므로,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만’한다고 말씀하신다(요일4:21). 우리는 사도 요한이 사랑과 순종을 같은 의미로 묘사하고 있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 14:15, 23, 24; 15:12, 14, 17; 요일 2:3; 5:3; 요이 1:6)

순종을 사랑과 연결시키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이 성도들의 하나님 됨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하나님 나라 사역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교회와 소그룹 내의 성도들의 영적인 하나 됨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요일3:11) 그리스도는 사랑이 좋은 생각이나 지나치게 감성적인 느낌에 근거한다는 신화를 깨뜨리신다. 주님은 우리의 행위와 믿음이 조화를 이루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는, 보다 놓은 수준에서 사랑의 개념을 정의하신다. 사랑은 캠퍼스에서 달콤하게 속삭이는 낭만도 아니고, 상대방이 나와 똑같이 되기를 강요하는 관계도 아니다. 도리어 우리는 하룻밤에도 몇 번이고 지친 모습으로 아기의 침대로 달려가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또는 침몰하고 있는 배 안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 구명보트의 자리를 포기하는 이의 모습에서 진정한 사랑을 발견한다. 사랑은 십자가에 계신 그리스도이시다 - 그 분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다(롬5:8)

예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우리의 시간과 관심과 정력을 바쳐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는 귀한 하나님의 자녀로 보기를 요구하신다.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인 우리는 누구를 사랑할 것인가가 아닌, 오직 사랑하는 일을 선택할 뿐이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우리는 혼자 고립된 상태에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명령에 순종할 수 없다.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서로간의 관계를 형성시키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그러나 공동체 안에서 알게 되는 모든 사람들과 쉽게 잘 지낼 수 있고, 서로 만족할 수 있는 절충안을 통해 어떠한 갈등도 해결할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다르게 만드셨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다른 생각과 필요를 가지고 공동체에 참여한다는 것을 아신다. 어떤 소그룹이든지 상처 입은자, 마약 중독자, 마음이 상한 자 등에 의해 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그런 갈등들을 잘 극복하고 승화시킴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성장하는 것이다.

사랑은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그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이기적이지 않고 희생적이며,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사랑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들의 과거의 잘못을 돌아볼 때 도저히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들을 향한 것이며, 그들이 간절히 원하는 필요를 채워 주는 사랑이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수준은 너무 높아서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달할 수가 없다. 오직 우리가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말씀을 충실히 적용할 때만 가능하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에서 ‘산다’는 표현 대신 ‘사랑’이라는 단어를 넣어 보자. “이제는 내가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랑하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랑하는 것이라”

목적이 이끄는 공동체의 성도로서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사랑해서는 안 된다. 또한 사랑받을 만한 사람만 사랑해서도 안 된다. 진정한 사랑을 위한 우리의 기준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일 4:10,11)

☆ 생각할 점 – 사랑은 의지적인 행동이다.
☆ 외울 말씀 -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 (요13:34)
☆ 삶으로 떠나는 질문: 오늘 당신의 삶에서 별로 맘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 어떻게 그리스도의 자기 희생적인 사랑을 보여 줄 수 있겠는가?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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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요한님의 댓글

노요한 작성일

이전에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성경 말씀 중의  하나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누가 네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도 돌려 대어라" 등 역설적인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것은 나의 감정이 허락할 수 없는 불가능한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감정 이상의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의 죄를 당신의 죽음으로 까지 바꾸신 주님은
우리에게 더 높은 수준의 사랑을 요구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진짜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의지와 행동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주님은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우리가 감정에 따라 사랑한다면 세상의 사랑과 전혀 다를 것이 없을 것이요, 예수님이 우리를 행동으로 사랑하신 것 같이 사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변하는 변덕스러운 감정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의지와 행동으로 사랑을 나누고 연습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이제는 주님의 역설적인 말씀이 정말 이해가 됩니다.
원수도 그 불쌍한 영혼때문에 사랑할 수 있고,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도 돌려댈 수 있는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실천적인 사랑이 저의 삶 속에서 이루어 질 수 있도록 진심으로 기도하며 저의 최선을 다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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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천민님의 댓글

박천민 작성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그리스도께서 내가 미워하는 형제 내가 소홀히 하는 형제 나를 무시하는 형제 내가 보기에 한심한 형제 내가 무시하고싶은 형제를 위해서도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리고 그 주님께서 그런 형제를 위해 죽으셨으니 나도 그렇게 그들을 사랑하라고 명하신다.

정말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수준은 너무 높아서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달할 수가 없다."
주님의 사랑을 믿으며 나 자신을 부인하는 삶 그래서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만 행하실 수 있는 명령이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저자의 말대로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에서 ‘산다’는 표현 대신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주님의 명령을 어떻게 이룰 수 있는지 감이 잡힌다.

'이제는 내가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랑하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랑하는 것이라'

정말 사랑은 내게서 나온 것이 아님을 실감한다.  날마다 순간마다 주님께서 나의 삶의 주인이 되도록 주님께 내 삶과 마음의 보좌를 내어드릴 때만이 주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길임을 실감한다.

주님, 오늘도 주님의 관점으로 주님의 심정으로 주님의 사랑으로 형제들을 바라보게 하소서. "이제는 내가 사랑한 것이 아니요"... 정말 편협하고 주관적인 나대로 식의 사랑이 아니라 주님의 무조건 적이고 희생적인 사랑, 끝까지의 사랑을 배우고 실천케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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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천민님의 댓글

박천민 작성일

2/18/2013

"서로 사랑하라"라는 주님의 명령은 일반적인 사랑이나 누구나 할 수 있는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자가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다른 자들과 나눌 수 있는 사랑이다.
예수님의 이 명령을 순종하려면, 상호간에 예수님의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관계성 즉 교회에 소속되어야함을 말씀하시고 계신다..

예수님의 사랑은 무조건 적이요, 의도적 희생적이요, 그리고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이셨다.
이런 예수님의 사랑은 "무슨 일이 일어나도" (No matter what) 끝까지의 사랑이다.
주님께서 이런 사랑을 기억하고 믿고 실천할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시고 교회가 탄생되도록 하셨다.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과 명령을 믿는 공동체를 주시고 내가 그 공동체에 소속하게 하셔서 "서로"라고 부를 수 있는 관계를 허락하신 주님이 얼마나 감사한지. 정말 두고 두고 감사할 일이다.

이제 내게 남은 과제는 사랑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항상 사랑에 관해 이야기 하고 심지어 설교도 많이 했으면서, 그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항상 느끼고 있다. 

이번 40일 Better Together 캠페인을 통해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본격적인 계기가 되기를 소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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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미진님의 댓글

양미진 작성일

"나는 당신이 필요해. 나는 당신을 원해. 당신을 소유하고야 말겠어" 라고 노래하는 것은 참된 사랑이 아니다. 그것을 정욕적인 사랑이다. 진정한 사랑은 어떻게 하면 내가 섬김을 받을 수 있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가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한다.

우리 안에 정욕적인 사랑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위의 노랫말처럼 무섭게 달려들지 않더라도... "난 당신이 이렇게 행동하기 바래, 당신이 이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 당신이 변한다면 우리 관계는 훨씬 좋아질거야, 그렇지 안으면 난 당신을 사랑할 수 없어" 나에게 이런 마음이 있다면. 우리에게 이런 마음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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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미진님의 댓글

양미진 작성일

Jesus requires us to view other people as highly valued children of God...

제가 지난 몇년간 패밀리 세이버 센터에서 배우며 깨닫게 된 것은 제 안에, 그리고 대부분의 죄인들 안에 있는 "자기 연장, self extension" 이라는 성향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 다른 사람들을 나의 생각, 나의 세계 안에 집어 넣고 내 마음대로 컨트롤 하려는 성향입니다. 흔히 자기중심적 성향이라고 알고 있는 것인데 내가 나름 좋은 의도에서 하는 생각, 말, 행동들도 얼마나 교묘히 내 중심적인지 알게해준 심리학적 개념입니다.
다른 사람을 그 사람 모습 그대로 인정하지 않고 그가 딱 내가 원하는대로, 옳다고 믿는 대로 해야 한다고 무의식 중에 믿으며 그 사람을 고치려 하거나 (지속적 조언, 비난, 논쟁), 속으로 괴로워하는 (실망, 체념, 무시) 저와 우리 모두의 모습이 여기에 속합니다.
자기 연장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단점까지도 그냥 그 사람의 것으로 인정, 존중하고 (개별화, 분리) 내가 그것때문에 괴롭다면 그것을 철저히 나의 문제로 인식하고 해결하려 합니다. 그중 한 방법은 그 불편함을 비난이나 지적, 불평으로 표현하지 않고 I message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사정, 속마음, 백그라운들을 내가 다 모른다는 것을 진정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판단과 비난의 덫에 잘 걸리지 않습니다.
저는 내가 지난 수십년을 자기연장의 뷰로 다른 사람을 인식하면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잡을 수 없는 신기루에 불과했다는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받기에 합당한 하나님의 자녀로 본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해 좋게만 생각하라든지 나의 불편함을 억누르고 참으라든지 하는 비현실적인 명령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내가 이제껏 뻗어놓고 있던 나의 연장선을 하나씩 거둬들이고, 그에게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겠지, 그 사람이 꼭 내 기준에 맞게 할 필요는 없지, 나는 왜 그 사람의 어떤 말이 힘들까, 내 안에 어떤 불편함이 있지? 라고 생각할 수 있는 힘에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 또한 쉽지는 않지만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훈련가능한 일이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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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미진님의 댓글

양미진 작성일

Jesus requires us to view other people as highly valued children of God...

제가 지난 몇년간 패밀리 세이버 센터에서 배우며 깨닫게 된 것은 제 안에, 그리고 대부분의 죄인들 안에 있는 "자기 연장, self extension" 이라는 성향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 다른 사람들을 나의 생각, 나의 세계 안에 집어 넣고 내 마음대로 컨트롤 하려는 성향입니다. 흔히 자기중심적 성향이라고 알고 있는 것인데 내가 나름 좋은 의도에서 하는 생각, 말, 행동들도 얼마나 교묘히 내 중심적인지 알게해준 심리학적 개념입니다.
다른 사람을 그 사람 모습 그대로 인정하지 않고 그가 딱 내가 원하는대로, 옳다고 믿는 대로 해야 한다고 무의식 중에 믿으며 그 사람을 고치려 하거나 (지속적 조언, 비난, 논쟁), 속으로 괴로워하는 (실망, 체념, 무시) 저와 우리 모두의 모습이 여기에 속합니다.
자기 연장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단점까지도 그냥 그 사람의 것으로 인정, 존중하고 (개별화, 분리) 내가 그것때문에 괴롭다면 그것을 철저히 나의 문제로 인식하고 해결하려 합니다. 그중 한 방법은 그 불편함을 비난이나 지적, 불평으로 표현하지 않고 I message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사정, 속마음, 백그라운들을 내가 다 모른다는 것을 진정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판단과 비난의 덫에 잘 걸리지 않습니다.
저는 내가 지난 수십년을 자기연장의 뷰로 다른 사람을 인식하면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잡을 수 없는 신기루에 불과했다는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받기에 합당한 하나님의 자녀로 본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해 좋게만 생각하라든지 나의 불편함을 억누르고 참으라든지 하는 비현실적인 명령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내가 이제껏 뻗어놓고 있던 나의 연장선을 하나씩 거둬들이고, 그에게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겠지, 그 사람이 꼭 내 기준에 맞게 할 필요는 없지, 나는 왜 그 사람의 어떤 말이 힘들까, 내 안에 어떤 불편함이 있지? 라고 생각할 수 있는 힘에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 또한 쉽지는 않지만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훈련가능한 일이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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