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사랑의 회복을 위하여" (데살로니가전서 3:10-13) 9/24/2017 > 주일 설교

본문 바로가기


회원로그인

회원가입
church2.jpg
주일 설교

 

"온전한 사랑의 회복을 위하여" (데살로니가전서 3:10-13) 9/24/2017

페이지 정보

본문

“우리는 여러분의 얼굴을 볼 수 있기를, 또 여러분의 믿음에서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줄 수 있기를 밤낮으로 간절히 빌고 있습니다. 11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께서 우리의 길을 친히 열어 주셔서, 우리를 여러분에게로 가게 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12 또 우리가 여러분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주께서 여러분끼리 서로 나누는 사랑과, 모든 사람에게 베푸는 여러분의 사랑을 풍성하게 하고, 넘치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13 그래서 주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굳세게 하셔서, 우리 주 예수께서 그분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오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잡힐 데가 없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살전 3:10-13)


예일대학교 심리학 교수 스턴버그란 분은 남녀간의 사랑 혹은 부부간의 사랑의 세가지 요소를 말합니다. 열정, 친밀감, 헌신.  이분의 이론에 의하면 열정은 처음 사랑을 시작할 때는 급속하게 발전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강도가 약해지고 가장 먼저 사라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열정의. 자리를 친밀감이 메워 준다고 합니다. 친밀감은 만남의 횟수와 교제 기간에 비례해서 서서히 증가하다가 너무 익숙해지면 친밀감도 둔화되기 시작하고 숨어버린다고합니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 약속과 책임감이라고합니다. 이 것을 헌신이라고 말하고 영어로는 commitment라고 합니다.

열정이나 친밀감은 감정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변하기 쉽고 주위의 영향을 쉽게 받습니다. 그렇지만 약속과 책임감은 감정처럼 쉽게 변하지 않으며 그 사랑을 어떤 경우에도 지속하겠다는 헌신이요 결단이라고 합니다.

스턴버그에 의하면 “친밀감과 열정을 갖고 있으나 헌신이 없는 관계를 낭만적 사랑, 감정적 사랑이라고 설명합니다.” 저는 이런 남녀간의 혹은 부부간의 사랑의 분석이 성도들간의 관계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처음 만나서 서로 없으면 못 살것처럼 굴다가 조그만 문제가 생기면 하루 아침에 관계가 깨지는 감정적인 사랑의 관계가 얼마나 많습니까? 서로에 대한 헌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식구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제가볼 때는 우리 교회 식구들이 오래동안 서로를 알다 보니까 열정도 식어버리고 친밀감마저 부족하며 단지 서로에 대한 약속과 책임감에 의해 유지되는 관계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어떤 면에서 이 것이 단지 열정과 친밀감에 의존하는 감정적인 관계보다는 좀 더 성숙한 관계라고 위로해 보지만 정말 이 것이 더 바람직한 관계인가?  마음으로 느끼는 사랑은 없이 그저 약속 때문에 억지로 유지되는 관계라면 감정적인 관계 못지 않게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헌신이 없이 열정과 친밀감만 있는 관계를 감정적인 관계 낭만적인 관계라고 부른다면, 열정이나 친밀감이 없이 상대방에 대한 헌신만 있는 관계를 공허한 사랑 (Empty love)이라고 스턴버그는 표현합니다. 실속이 없는 관계라고 혹평합니다.  열정이나 친밀감 없이 단지 의무감에 의해서 지속되는 관계라면 얼마나 메말른 관계이겠습니까?  물론 관계에 대한 헌신이 있어야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도로서 추구해야할 가장 바람직한 관계는 친밀감, 열정, 헌신의 사랑의 세가지 요소를 모둔 갖춘 온전한 사랑(Consummate love)의 관계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사도바울과 실라와 디모데가 얼마나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열정적으로 사모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10) “우리는 여러분의 얼굴을 볼 수 있기를, 또 여러분의 믿음에서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줄 수 있기를 밤낮으로 간절히 빌고 있습니다.”  보고싶어서 미치겠다는 말아닙니까? 얼마나 열정적인 사랑입니까?

그런데 그 다음 절 (v. 12)에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제목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가 여러분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주께서 여러분끼리 서로 나누는 사랑과, 모든 사람에게 베푸는 여러분의 사랑을 풍성하게 하고, 넘치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우리가 당신들을 이토록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것 같이 서로 그리고 다른 지역의 성도들을 (풍성하게 넘치게) 열정적으로 사랑하게 되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약속과 책임감 때문에 관계성을 겨우 유지하는 정도의 사랑이 아니라 보고싶어서 견디지 못할 사랑,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줄 그런 열정적인 사랑을 데살로니가 성도들도 갖도록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바울의 이 기도는 저와 여러분을 포함한 모든 성도들을 위한 기도인 것을 믿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사랑을 할 수 있을까? 그 대답은 열정적인 사랑을 가졌던 사도바울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빌립보서 1:8)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 (심정, 사랑, affection)이 자기 속에 있기에 빌립보교회를 뜨겁게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에게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한다고 고백합니다.  갈라디아 교회들에게는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고 고백합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때문에 사는 자입니다. 

사랑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요일 4:9)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리셨으므로 사랑을 알게 되었고,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 간에 열정적인 사랑을 나누려면 우리는 먼저 열정적인 주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에 대한 열정과 친밀감은 잃고 오직 헌신만 있는 공허한 사랑 (Empty love)의 관계를 유지할 때가 많습니다.  계시록에 보면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네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열정과 친밀감을 잃은 사랑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이 책망이 우리를 향한 책망이 아니겠습니까?  주님께서 에베소교회에게 계속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해 내서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을 하여라. 네가 그렇게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 (계 2:5)

여러분 주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했을 때 했던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느끼도록 할 수 있는 일 그래서 결국 형제들을 뜨겁게 사랑할 수 있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로, 우리가 온전한 사랑을 회복하려면 하나님의 말씀 성경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예수를 만나기 전 그리스도인들을 심하게 박해하던 자입니다. 그랬던 그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한다고까지 고백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고 고백할 수 있게되었는가?
 
바울이 예수를 믿던 자들을 박해하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던 중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이단의 괴수라고 생각했고 죽었다고 생각한 그 예수가 부활하신 몸으로 바울에게 나타났을 때, 바울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란 증거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바로 자신의 죄 때문임을 성령님의 도움으로 깨달은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만난 적도 더더욱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도 부활하신 모습도 본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바울의 증거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환난 가운데 있으면서도 바울이 전한 증거를 성령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증거한 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 때문에 이들은 사랑의 수고를 베푸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극심한 가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다른 성도들을 위해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뻐하는 마음으로 헌금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얼굴로 만나 본적이 없습니다.  그 분이 십자가에 달린 것을 본적도 그 분이 부활하신 모습도 본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이 기록하고 사도들이 기록한 성경의 내용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그리스도를 대면합니다. 그분을 알게되고 그 분의 사랑을 믿게됩니다. 오늘도 그들의 증거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게될 것입니다.

베드로가 당시 소아시아 지역에 있던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사랑하며, 지금 그를 볼 수 없으면서도 믿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영광과 즐거움을 바라보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벧전 1:8) 2천년 전의 소아시아 성도들도 우리들처럼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었지만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소망가운데 살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베드로를 통해서 듣게된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믿었기때문입니다. (벧전 1:23)

요한도 십자가에 달리시고 장사된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요한복음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해서 보내신 분으로 우리의 죄를 위한 속죄물이 되시기 위하여 오셨다고 증거합니다.  그리고 요한은 이 자신의 증거를 하나님 자신의 증거라고 선언합니다. (요일 5:9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의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사도들의 증언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편지로, 하나님의 증거로 받아들일 때 그리스도를 만나고 믿게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게됩니다.

우리들이 사용하는 찬송가 563장의 제목은 ‘예수 사랑하심을’인데 가사를 기억하시나요?  “예수 사랑하심을 성경에서 배웠네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쓰였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배웁니다. 성경을 떠나서는 우리들의 추리와 상상과 계산으로는 예수님의 사랑을 알 수 없기때문입니다.

이미 오래 전 일이지만, 우리가 창세기 훈련을 받으면서 감격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이유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와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 란 사실을 배웠기 때문이 아닙니까? 모든 피조세계를 사람을 염두에 두고 지으신 하나님의 심정을 배웠기 때문이 아닙니까?  심지어는 선악과도 하나님의 사랑 받는 존재란 표시란 것을 배웠기 때문이 아닙니까?  이 사랑때문에 하나님은 죄인을 찾으시는 분임을 배웠습니다. 이 사랑 때문에 결국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인간이 가치 있는 존재요 목적이 있는 존재요.  인간의 죄가 죄가 됨을 배웠습니다.

사도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할 때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로 인해 감사했던 것 기억하시지요? 믿음과 사랑은 함께 갑니다. 무슨 믿음입니까?  바울의 증거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믿음입니다.  바울이 증거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입니다. 또 데살로니가 후서에서도 이렇게 감사합니다.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찌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살후1:3)  믿음이 자라는 만큼 성도간의 사랑도 풍성해집니다.

에베소교회에 대해서도 이렇게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주 예수를 믿는다는 것과, 여러분이 모든 성도를 사랑한다는 것을 듣고서, 16 여러분을 기억하면서 기도를 올리며, 여러분을 두고 끊임없이 감사를 드립니다.” (엡 1:15-16); 골로새 교회에도 이렇게 감사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할 때에, 항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4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여러분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게 품은 여러분의 사랑을, 우리가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골 1:3-4)

이 말씀들을 통해서 우리는 분명한 공식을 하나 배웁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자랄 때에 우리의 사랑도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성경을 떠나서는 우리의 믿음이 자랄 수 없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창세기훈련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 것은 “창세기를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편지로 이해할 수 있는 안목을 키움.”. 성경의 각 페이지 속에 우리를 이토록 사랑하사 자기 아들도 아끼시지 않고 보내신 그 하나님을 만날 때에 우리의 믿음이 자라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여 열정과 친밀감과 헌신으 온전한 사랑을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째로, 우리가 온전한 사랑을 회복하려면 기도에 열심을 내야합니다.

이번에 북한에서는 계속 미사일 발사를 함에도 남한에서는 계속 대화 대화를 주장하니까 어떤 사람이 이런 댓글을 썻습니다.  대화는 혼자 하는게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대화는 혼자 하는게 아닙니다. 서로 간에 해야하는 것입니다.  (계 3:20)

하나님께서 아무리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시더라도, 연애 편지를 보내시더라도 우리 쪽에서 아예 그 편지를 읽지 않거나 읽었더라도 반응이 없으면 무의미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예배로 기도로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형상대로 만드신 것은 우리와 교제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신 것도 하나님과의 막혔던 담을 헐고 교제할 수 있도록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그 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기 위해서 부르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계 3:20) 예수님은 변치 않고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와 교제를 나누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문을 열 생각을 안하고 예수님을 문 밖에 세워두고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부부간이나 인간간의 사랑의 깊이도 얼마나 대화하기를 좋아하는 가 얼마나 대화를 자주하고 깊이하는가에 의해 좌우되는 것처럼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은 예외 없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하기에 열심을 내는 사람들이었 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쉬지말고 기도하라고 권고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 10절에 보면 “우리는 여러분의 얼굴을 볼 수 있기를, 또 여러분의 믿음에서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줄 수 있기를 밤낮으로 간절히 빌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바울 스스로가 밤낮으로 간구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예수님과 대화하는 것이요 예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 지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기도의 또 다른 중요한 역할에 대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12절을 읽습니다. “또 우리가 여러분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주께서 여러분끼리 서로 나누는 사랑과, 모든 사람에게 베푸는 여러분의 사랑을 풍성하게 하고, 넘치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성도간에 온전한 사랑을 나누게 해 주시는 분은 주님이신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좀 전에 이미 말씀 드렸지만 사도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사랑의 수고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서로 간의 사랑이 풍성함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했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에베소교회와 골로새 교회가 모든 성도를 사랑한다는 것을 듣고서, 하나님께 감사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감사를 드린다는 것은 그 분이 해주셨기 때문에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이들의 사랑이 만약 자발적인 생각과 노력에 의해서 된 것이라면 하나님께 감사드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3:12을 또 다시 읽습니다. “주께서 여러분끼리 서로 나누는 사랑과 모든 사람에게 베푸는 여러분의 사랑을 풍성하게 하고, 넘치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바울은 이 기도를 통해서 서로에 대한 사랑과 다른 성도들을 위한 풍성한 사랑이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알기에 주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성령님의 열매이기때문에 우리는 기도해야합니다.

기도 안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고, 기도하지 않으면서 형제 자매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온전한 사랑을 회복하려면 우리 자신을 위해 그리고 다른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며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하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기도에 열심을 내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열정적인 사랑을 느낄 때까지 가만히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보면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바울처럼 아직 풍성한 사랑을 베푸는 단계에 이르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더욱 더 사랑을 하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4:10).  그들은 아직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처음부터 완전한 사랑을 실천할 수는 없습니다. 가장 적은 것에서 부터 사랑의 실천을 행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온전한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서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또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 져야겠습니다.  그리고 적은 것에서부터 사랑을 실천하므로 온전한 사랑의 회복이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댓글목록

profile_image

박천민님의 댓글

no_profile 박천민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온전한 사랑의 회복을 위하여”  ‬ ‭(살전 3:10-13)  9/24/2017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한 것이 온전한 사랑을 하는 길이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 (심정, 사랑, affection)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빌1:8)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고 고백합니다.” (갈 2:20)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리셨으므로 사랑을 알게 되었고,..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 (요일 4:9,19)  네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 를 생각해 내서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을 하여라. 네가 그렇게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 (계 2:4,5)

1. 온전한 사랑을 회복하려면 성경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들의 증거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임: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 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살전 2:13)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사랑하며, 지금 그를 볼 수 없으면서도 믿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영광과 즐거움을 바라보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벧전 1:8)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의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것이니라” (요일 5:9)

믿음의 성장과 사랑의 성장은 병행하는 것이다: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찌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살후1:3) 
“여러분이 주 예수를 믿는다는 것과, 여러분이 모든 성도를 사랑한다는 것을 듣고서, 16 여러분을 기억하면서 기도를 올리며, 여러분을 두고 끊임없이 감사를 드립니다.” (엡 1:15-16);

“우리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할 때에, 항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4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여러분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게 품은 여러분의 사랑을, 우리가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골 1:3-4)

2. 우리가 온전한 사랑을 회복하려면 기도에열심을 내야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주께서 여러분끼리 서로 나누는 사랑과, 모든 사람에게 베푸는 여러분의 사랑을 풍성하게 하고, 넘치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살전 3:12)  사랑을 풍성케 해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계 3:20)

Total 310건 8 페이지
주일 설교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205 no_profile 박천민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6 11-12
204 no_profile 박천민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581 11-05
203 no_profile 박천민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301 10-29
202 no_profile 박천민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423 10-15
201 no_profile 박천민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454 10-08
열람중 no_profile 박천민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544 09-24
199 no_profile 박천민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610 09-10
198 no_profile 박천민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468 09-03
197 no_profile 박천민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920 08-27
196 no_profile 박천민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405 08-21
195 no_profile 박천민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285 08-13
194 no_profile 박천민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351 07-30
193 no_profile 박천민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2 07-23
192 no_profile 박천민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465 07-09
191 no_profile 박천민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501 07-02

검색


사이트 정보

회사명 : 회사명 / 대표 : 대표자명
주소 : OO도 OO시 OO구 OO동 123-45
사업자 등록번호 : 123-45-67890
전화 : 02-123-4567 팩스 : 02-123-4568
통신판매업신고번호 : 제 OO구 - 123호
개인정보관리책임자 : 정보책임자명

  • 게시물이 없습니다.

접속자집계

오늘
100
어제
1,107
최대
13,037
전체
1,898,134
Copyright © 소유하신 도메인. All rights reserved.